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안 페론 (문단 편집) == 생애 == 아버지는 이탈리아계 스페인인의 후손이었고, 어머니가 [[아메리카 원주민]]인 테우엘체 족 출신이었지만 그 당시 아르헨티나에선 원주민과 원주민-백인 간 혼혈인인 [[메스티소]]가 차별받았기에[* 아르헨티나는 현재도 전체 인구의 95%가 백인계인 나라이다. 즉, 아르헨티나에서 메스티소나 원주민들은 사회•경제적인 지위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철저한 약자인 것이다. 유전적인 검사 자료에 의하면 유전적인 형태의 메스티소 인구가 상당수 존재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유럽계 백인과의 통혼으로 외형적으로 더욱 백인에 가까운 형태가 된 데다가 원주민을 탄압하면서 원주민의 피를 지닌 메스티소들도 백인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볼리비아와 국경을 접한 후후이 주와 살타 주 등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메스티소가 더러 보이기는 한다.] 친가에선 후안 페론이 메스티소라는 사실을 숨겼다.[* 다른 남미의 백인계 국가였던 칠레가 백인과 원주민 간 혼혈인인 메스티소를 홀대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인지 멕시코나 과테말라처럼 혼혈인 메스티소도 적지 않은 편이다. 다만 칠레 역시 남부 개척 과정에서 칠레로의 복속을 거부하던 마푸체족 및 알라카루페족 같은 남미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흑역사가 있었다.] 1911년에 군사학교에 입학하면서 군인으로써의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에 승진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착실하게 군인으로써의 길을 걷던 중에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발령이 나면서 [[파시스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영감을 얻게 되었다. 이는 이후 페론의 행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귀국 후에는 1943년 군사 [[쿠데타]]에 참여해서 13년간 통치했던 군부 독재 정권을 뒤엎는데 성공한다. 후안 페론은 군사 쿠데타에 참여한 공로로 노동사회복지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공산당]] 계열의 노조는 탄압했지만 [[노동조합]] 세력을 우대해 노동정책에서 그동안 사민주의 세력도 하지 못했던 공적을 남겼다는 호평을 들을 정도로 큰 성과를 내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페론 시대 그의 최대이자 일관된 지지층은 노동조합 세력이었다. 이후 에바 페론 등이 지지한 여성 참정권 부여를 통해 여성 지지층도 확보하게 된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1945년 [[부통령]]직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헌을 지지하는 쿠데타로 모든 직책을 잃고 야인이 될 위기에 처했으나 페론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와 아내 '[[에바 페론]]'의 노력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시위로 풀려난 후안 페론은 194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노동사회복지장관 재임 당시의 업적을 내세워 약 53%의 득표율로 30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약 45%를 득표한 [[급진시민연합]] 후보에게 승리하게 된다. 대통령 취임에 성공한 페론은 노동자의 권리를 더욱 증진시키는 정책을 펼치면서도 동시에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반대파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하지만 산업 발달 및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전후 복구로 인한 수요 상승, 임금 상승, 중산층 확충, 복지 확충으로 인한 내수 증진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여기에 아내 [[에바 페론]]의 헌신적인 내조와 여성 참정권 부여, 외국계 기업의 국영화 정책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49년에 헌법을 개정했고,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63.5%의 득표율을 얻어 급진시민연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 등 주요 강대국들이 전후 복구를 거치며 공업 생산량을 증대시키면서 아르헨티나산 제품의 수요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아르헨티나의 경제도 덩달아 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또한 후안 페론의 성향과는 별개로 [[나치의 남미 도주|나치 인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나치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은 국가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이는 경기 침체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지지율을 유지시킬수 있었지만 에비타(에바 페론)가 암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이후에 이혼과 매춘을 합법화하면서 가톨릭 교회와 척을 지어 독실한 신도들의 지지를 잃었으며 군부내에서도 반 페론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1955년 9월, 후안 페론은 '''페드로 아람브루'''의 [[1955년 아르헨티나 쿠데타|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이후 페론은 해외로 망명가는 신세가 되었고, 이후 새로히 들어선 군사정권은 후안 페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페론주의자들의 출마를 금지시키고, 페론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 물론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페론주의자들은 군사정부에 대항하려 했지만 진압되었다. 후안 페론은 쿠데타 이후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이탈리아, 스페인 등 중남미와 유럽 여러 나라를 오가며 생활했고 자서전을 집필하면서 좌파 및 극우파와의 만남도 긴밀히 가지며 노조를 물밑 지원하는 방식으로 정치적인 재기를 노렸다. 또한 1961년 스페인에서 [[이사벨 페론]]과 재혼을 했다. 후안 페론은 아람부루 군사정권이 경제정책에 있어서 지극히 무능하다는 점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디폴트와 모라토리엄도 사실상 아람부루 정권때 시작되었다. 후안 페론 정권의 잔재를 청산한다고 경제정책을 변경했으나 되려 경상수지 적자가 급속히 커지게 되었고, 이를 외채 돌려막기로 일관하면서 망해버린 것이다. 물가가 급속히 상승한 것은 덤이었다.(...)] 오래가지 않아 복권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페론주의자들에게 그나마 반 페론주의적인 색채가 덜한 '''아르투로 프론디시'''에게 투표하라고 촉구했고, 실제 선거에서도 프론디시가 52.7%로 승리를 거두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 유권자들에게 남아있는 후안 페론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이후 페론은 프론디시 정권과 전략적인 제휴를 취하며 프론디시를 물밑에서 지원했다. 또한 1950년대에 혼란스러웠던 경제 상황이 1960년을 전후하여 정상화되기 시작하면서 페론주의자들의 입지가 굳어졌다. 이렇게 후안 페론의 [[와신상담]]이 성공하는 듯싶었지만 이는 입지가 좁아진 보수주의자와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프론디시 대통령이 선거에서 페론주의자들의 출마 금지를 풀어버려 페론주의자들이 대거 선거에 당선되자, 위험을 느낀 군부에서 [[1962년 아르헨티나 쿠데타|쿠데타]]를 일으켜 프론디시가 도중에 실각해버렸다. 또한 신임 정부는 군부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정계로 복귀하려는 꿈은 좌절되다시피 했다. 이렇게 되어버리자 후안 페론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러 후보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기권을 주장하며[* 그 덕분에 1963년 대선에서 기권표의 비율은 20%에 근접할 수준이었다.] 희망을 버린 듯한 행보를 보였고, 1966년의 [[196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군부 쿠데타]]로 '''후안 카를로스 온가니아'''가 집권한 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온가니아를 비롯한 군부 정권은 경기 침체와 야당 탄압으로 인해서 지지율이 낮았고, 군사 독재에 반발하는 정치 테러가 횡행하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다. 후안 페론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페론주의자들을 후원하며 민주화 시위와 파업에 있어서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했다. 결국 1972년에 '''알레한드로 아구스틴 라누세''' 대통령이 페론주의파 및 급진시민연합, 사회당 등과 협상을 하여 민주화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페론주의자들의 출마 금지를 풀었고, 그 동안의 정치 혼란과 군사 독재에 지친 아르헨티나인들은 후안 페론을 환영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1973년에 걸쳐 치러진 총선에서 친 페론파가 압승을 거두었다. 친 페론파가 집권한 아르헨티나 정부에선 페론의 귀국을 허용했다. 오랜 망명 생활에서 벗어난 페론은 노동자 권리 증진과 정치 혼란의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그 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61.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이미 고령이었던 페론의 건강 상태는 이미 상당히 나빴다. 그래서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대행하는 경우가 많은 반쪽짜리 대통령 신세였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 채 1년도 못 된 1974년 7월 1일 노환으로 향년 79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